30 9월

설립자는 그가 아니다

평택대학교는 선교사 피어선의 유지대로 1915년 9월 17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교사 신축 정초식을 가졌다. 당시 상하수도시설조차없던 오물밭에 최신 서양식 근대건축으로 종로 명소로 알려질만큼 훌륭한 교사로 근대교육의 기틀을 기진 최신 신학교육기관이었다.

미국에 거의 모든 대학은 신학교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러한 기반을 가진 피어선학교는 이미 국내 최고의 대학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식민지일제의 신사창배거부등 탄압과 전쟁으로 피어선신학교는 수차례 문을 닫았었지만 여전히 당대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교육정책에 순응하지 못하고 학교운영을 방만히 하다 다른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설립인가를 받을때 피어선 신학교 출신 사무국장이던 조기흥씨가 학교운영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학교인가도 받지않은 채 종로의 금싸래기 땅을 눈여겨 보며 군침을 흘렸을 것이다.

결국 피어선성경학교 앞 부지의 막대한 토지를 매각하기 이르른다. 이때 국가기록원의 자료에 따르면 부동산 거래 소개자기 조씨로 등재되어 있다.
이후 졸부가 된 그들은 첫이사장 조문기와 해외여행을 한달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년도 채 되기전 이사장 조문기의 죽음을 통해 조기흥은 이사장으로 등극하고 모든걸 손아귀에 지게된다.

각종학교인 신학교 설립인가를 받게 된 계기는 학생으로 부터 시작되였다
일제시대 경주 도지동의 유덕사 자리에서 출토된 불상이 경주 남산을 여행하던 데라우치 총독에 눈에 띄어 남산 왜정대 총독관저로 갔다가, 1927년 현 청와대 터에 총독부 관저를 지으면서 불상도 옮겨왔다.

1970년대 초반 어느 날, 피어선 학생들이 청와대 안에 설치된 불상철거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이는 일제의 청산이기도 하며 기독교계의 당연한 주장이고 민주적 의사표현이었지만 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무엇보다 조기흥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정부의 담당자가 학교를 찾아와 학원인가서 제출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여차하면 학교 문을 닫게 만들겠다는 압력이었을 것이다. . 문교부의 인가를 받지 않은 신학교로서는 학교의 존립 기반이 무너질 위기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소동을 겪고 나서 이사회는 신학교를 정규대학으로 승격하기로 하고 1978년 드디어 학교 이전을 결의했다.

이것이 조기흥이 자신이 설립자라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각종학교인 피어선성서신학교의 설립인가는 1980년 12월에 나왔다. 그리고 1981년 3월 신학과 40명, 사회복지과 40명, 종교음악과 40명의 신입생을 받았다. 초미니 대학이 탄생한 것이다. 캠퍼스는 이때(당시 주소로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용이리) 현재의 평택대학교 부지로 옮겼다.

그 뒤 1990년 12월 정규대학 인가를 받은 피어선대학은 1996년 3월 명예로운 피어선을 버리고 학교 이름을 캠퍼스가 위치한 평택시의 이름을 따 평택대학교로 바꾸며 대학의 주인이 조기흥이라고 주장하며 36년을 사유화해 왔다.

이윽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습을 하며 대학 창학정신을 짓밟고 총장재임 20년간 급변했던 교육환경에 아무런 성과나 실적 없이 그동안 등록금잔치로 흥청망청 재정과 학사를 황폐화시켰다.
조기흥씨는 피어선 설립자의 묘소를 찾아 그의 유지를 팔아먹은 잘못을 백배 사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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